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순다 왕국 (문단 편집) === 후기 === 자바 동부의 신흥세력 [[마자파힛 제국]]이 세력을 확장하던 14세기, 순다 왕국은 마자파힛과 충돌하게 된다. 마자파힛 황제 [[하얌 우룩]]은 순다의 치트라레스미 공주(Citraresmi)를 황비로 맞아들이고자 하는 의향을 순다 왕국으로 전달했고, 떠오르는 강력한 제국과 친교를 맺을 희망에 부푼 순다 왕 링가 부아나(Lingga Buana)는 1357년, 딸과 함께 많은 왕족과 관료를 거느리고 마자파힛의 수도 마자파힛 근처 부밧(Bubat) 지역으로 이동하여 공주의 결혼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재상 [[가자 마다]]는 이 기회에 순다를 완전히 복종시키고자 하여, 치트라레스미 공주를 황비 대신 첩으로 삼을 것이라고 링가 부아나 왕에게 통보했다. 순다 왕은 화가 나서 결혼식 전체를 취소하고 순다 왕국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마자파힛군은 순다 왕의 행렬을 포위하고 공주를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결국 이런 갈등이 부밧의 전투로 커졌고, 이 전투에서 링가 부아나 이하 행렬에 참가한 순다 왕족과 관료가 거의 모두 사살되고 공주는 자결했다.[* 이 부밧 전투 전후 사정은 유명한 자바 고전 운문 작품 《키둥 순다》(Kidung Sunda)의 주제이다.] 이 사건으로 순다와 마자파힛의 관계는 지극히 악화되나, 이후 순다에서 니스칼라 와스투 칸차나(Niskala Wastu Kancana, 재위 1371–1475?[* 고전 연대기에서는 실제로 104년을 재위했다고 하는데, 생물학적으로 검증된 적은 없다.])가 어려운 시기에 선정을 펼쳐 순다 왕국이 마자파힛의 위협을 이겨내고 살아남았다. 말기인 16세기에 순다 왕국은 사방에서 지방 신흥 세력들의 표적이 되어 마침 [[말라카]]를 점령하고 군도에 도착한 [[포르투갈]] 세력과 무역–군사 협정을 맺고 살아남으려 노력하였으나(1522년; 순다–포르투갈 조약, Perjanjian Sunda–Portugal, Luso–Sundanese treaty),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포르투갈은 협정의 일부로 순다의 무역항 순다클라파(오늘날의 자카르타)에 요새를 지어주기로 하였으나 지켜지지 못했고, 오히려 순다클라파 항구는 얼마 못 가 [[인도네시아/역사#드막 술탄국|드막 술탄국]] 술탄 [[트릉가나]]의 원정으로 [[반튼]] 지역과 함께 점령당해 버렸다. 16세기 중반에는 명목상의 정치적 권위만 근근이 유지하다가 [[반튼 술탄국]]에 공격받고 수도 파자자란까지 점령당했으며, 자바 최서부 해안 근처의 산속에서 어떻게든 몇 년을 더 버티긴 하였으나 반튼의 지속적인 압박으로 1579년에 멸망하였다. 초기와 중기의 사료가 상대적으로 부실한 반면, 15세기와 16세기의 [[순다어]] 사료 《부장가 마닉》(Bujangga Manik), 《상향 식사칸다 응 카르시안》(Sanghyang Siksakanda Ng Karesian), 《차리타 파라향안》(Carita Parahyangan) 등과 다양한 순다어 구전 전승, 순다 지역에 관한 자바어, 중국어, 포르투갈어 기록 등을 종합하면 순다 후기의 사회상과 문화에 대해서는 상당히 구체적인 윤곽을 그려볼 수 있다. 이슬람 전파 이전 순다 지역에는 명목상 시바파 힌두교가 융성했지만, 순다식 힌두교는 순다의 토착 신앙 체계인 [[순다 위위탄]](Sunda Wiwitan)과 다층적으로 혼합된 양상을 보였다. 순다 지역에서는 [[시바]], [[비슈누]], [[인드라]], [[쿠베라]], [[바루나]] 등의 힌두 신이 기본적으로 숭배되기는 하였으나, '냐이 포하치 상향 아스리'(Nyai Pohaci Sanghyang Asri)라는 힌두교 전파 이전부터 숭배되어 왔던 쌀과 풍요의 여신이 주요 숭배 대상이었다. 여신의 사제는 전통 연례 축제에서 벼 종자를 축복하며 풍작을 기원하였는데, 이는 약간 변형된 형태인 '세렌 타운'(Sérén taun) 축제로 이슬람 전파 이후 현대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순다 지역에도 마타람–므당 시대와 마자파힛 시대의 자바 지역처럼 변형된 [[카스트 제도]]가 존재했을 것으로 보이며, 《부장가 마닉》이나 [[토메 피르스]]의 《동방지》 등을 보면 당시 순다 왕실 예법의 섬세함과 수도의 웅장함 등이 묘사되어 있으나, 건물이 부식에 약한 목재로 건축된 관계로 현대에는 순다 지역에서 순다 왕국 시대 건축물의 흔적을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힌두 문화권이었으므로 [[사티]] 풍습도 귀족들 사이에서 널리 행해졌는데, 남편이 죽을 때 도저히 따라 죽지 못한 부인은 출가하여 여성 수도자회에 입회하고 은거 생활을 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